요즘은 어느 때보다 젊은 작가들이 작업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예전에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의 턱이 높아 젊은 작가들이 감히 포트폴리오를 내밀지도 못했다면, 최근에는 작품공모를 통해 신진작가를 발굴하려는 갤러리가 늘고 있다. 대안공간과 입주작가제, 각종 기금 지원, 작가지원 프로그램 등을 통해 창작하고 발표할 수 있는 장이 생겼고, 인터넷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스스로를 홍보할 수 있는 환경도 마련됐다.
또한 20~30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이 국제 미술시장에 진출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지난 3월 뉴욕 소더비의 한중일 현대미술 경매와 5월 홍콩 크리스티, 6월 스위스 바젤아트페어 등에서 예상가보다 높은 가격에 젊은 작가의 작품이 팔렸다.

임상빈은 지난 4월 가나아트갤러리가 지원하는 창작 스튜디오인 아뜰리에의 첫 번째 해외 거주 국내작가로 선정되었고, 6월 영국 런던의 옥션하우스 본햄스에서 열린 아시아현대미술 경매에 참가해 좋은 결과를 얻기도 했다. 임상빈은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방식을 접합시켜, 풍경을 새롭게 변형시킨 사진 작업을 해 오고 있다.

디지털 프로세스를 이용한 사진작업을 계속해 오고 있다. 언제,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가?
대학 4학년이던 2000년부터다. 회화과에서 사진수업을 듣던 중 직접 인화한 사진이 너무 어둡게 나와 속상했는데, 스캔을 받아 컴퓨터로 밝게 보정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스캐너 사용이 미숙해 스캔을 받던 중 사진이 조금 움직여졌는데, 화면에서 스캐너 접촉면이나 움직임에 따라 포커스가 달라졌다. 일그러진 이미지와 손의 흔적이 신기하면서 충격적이었다. 실수로 벌어진 일이었지만, 사진이라는 종이 즉 어떤 물질이 스캐너라는 눈을 통해 차가운 디지털 코드로 변환될 때 움직임과 시간성으로 인해 원래의 물질이 다른 형태의 비물질로 전환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날로그가 디지털로 넘어가는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때부터 불을 꺼놓고, 빔의 움직임 속도에 맞춰 꽃이나 과일 등을 조금씩 끌거나 돌려가며 스캔을 받았다. 사과를 돌려가며 스캔 받았더니 애벌레로 표현되었고, 해바라기를 끌어가며 스캔 받았더니 아메바 같은 미생물로 표현되었다.

과일이나 꽃 등 물질을 움직여가는 아날로그 과정이 디지털 코드로 변환된 작업이 2001년 가졌던 첫 개인전 ‘아날로지탈(Analogital)’전이라면, 비슷한 시기에 가졌던 ‘기서비’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그때부터 계속해서 디지털을 이용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아날로지털’전이 정물을 이용했다면, 이후 나의 몸 부분 부분을 스캔 받기 시작했다. 지금은 나의 몸에 붙어서 내 머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지만, 손가락이 나에게서 떨어져 다른 생명체가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다. 다시말해 나의 몸을 스캔 받는다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나의 몸과 나의 DNA가 아닌 ‘0101’이라는 디지털 코드로 변환되어 더이상 내가 아니라는 상상을 했다.
나의 눈, 코, 입, 귀가 다른 사람의 눈, 코, 입과 섞여 나도 그 사람도 아닌 다른 변형체나 새로운 생물을 만들고, 몸이 아닌 바닷속 풍경이나 현미경의 미시적 세계 같은 풍경을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기서비’ 프로젝트였다. 현대 디지털 사회에서 개인의 아이덴티티는 하나가 아니다. 인터넷에서는 다양한 아이디를 쓰고, 가상 속의 자신을 만들어내는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지는 것이 현대 인간이다. 나도 내가 아니고, 너도 너가 아닌 너와 나 사이의 또다른 아이덴티티가 바로 ‘기서비’이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즐기고, 인터넷에서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디지털 시대에 붓으로만  생각을 표현하기는 힘들다. 새로운 미디어를 통해 나의 정체성과 내가 지금 바라보는 사회를 바라보는 것이 흥미로워, 실수로 시작했지만 계속 연구하고 있다.
 
한국에서 ‘기서비’ 프로젝트를 끝으로 임상빈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예일대학에서 회화 및 판화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후, 현대미술사에서 네오지오(Neo Geo, 신추상주의) 미술을 선도해온 피터 헬리(Peter Halley)의 스튜디오에서 10여개월 정도 일한 후,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가나아뜰리에에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부분과 전체, 현실과 가상, 실제와 이미지, 아날로그와 디지털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작업해 왔다. 그중 ‘도시 풍경’ 시리즈는 뉴욕과 서울의 대도시의 거대한 빌딩을 통해 표출된 자본주의 시스템과 도시의 끝없는 욕망에 주목한 작업이다.



‘도시 풍경’ 시리즈에서 건물에 초점을 맞춰 작업한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의 대도시를 여행하다보니 높은 건물이 너무 많더라. 시카고에만 90층이 넘는 건물이 80개 정도라고 하고, 특히 뉴욕에서 ‘도대체 왜 이렇게 높게 세웠을까? 단지 땅이 좁아서 이렇게 빽빽하고 높이 세워졌나? 그리고 저 안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건물들은 주위 건물과 공존하려기 보다 혼자서 더 높게 올라가려는 것 같았다. 건물 속에서는 외관과 다르게 다른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았지만, 이방인인 나로서는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 건물들이 어떻게 대도시에 생겨나고, 메트로폴리탄이 형성되었는지 알 수 있었고, 더 높아 지기 위해 탑이나 핀 침을 올리는 등 경쟁해온 역사를 알 수 있었다. 
건물의 높이 경쟁은 초기에 뉴욕과 시카고의 경쟁이었다면 이제는 아시아까지 번져 조만간 서울에도 100층 이상의 높은 건물들이 들어섰다고 한다. 사실 높아진다고 해서 경제적인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승강기도 더 만들어야 되고, 올라갈수록 공간 활용도가 적어진다.
뉴욕의 타임스퀘어에는 가짜 탑들이 많다. 건물의 역할은 안하고 밖에 광고만 부착해 거대한 가상의 건물을 만들어 놓았다. 또 라스베가스의 대부분의 건물은 사면을 판으로만 세워놓은 가짜 건물이다. 그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건물 층층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카지노를 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알고보면 1층 밖에 없다. 마치‘이렇게 거대하다’라는 속임수인 것이다.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 기술을 혼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LG트윈타워 사진을 보자. 그것은 LG트윈타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컴퓨터로 조작해 원래 보다 높은 80층을 만들어서 LG트윈타워가 아니고, 반대로 LG트윈타워를 찍었기 때문에 LG트윈타워이다. 공간도 LG트윈타워의 앞에서 찍었기 때문에 LG트윈타워지만, 주변의 산이나 하늘은 그 당시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가상이다. 현실의 아날로그적인 사물을 기계적인 작용으로 촬영하니깐 아날로그적 방식이고, 그것을 재해석, 재배치하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사물을 디지털적으로 확장한 것이니깐 아날로그에 기반한 디지털적인 재구성이다. 내 작업에선 아날로그적인 소스가 없으면 디지털적인 해석이 나올 수 없다. 항상 두 가지가 공존한다. 



인화된 사진을 촬영한 ‘재촬영 풍경’은 어떻게 표현된 작업인가?
건물을 디지털로 늘리거나 조작해 인화한 사진을 구부려놓고, 가까이에서 재촬영했다. 즉 굽어있는 아날로그 물질을 재촬영한 것이다. 이전의 스캐너 작업이 아날로그적인 나의 움직임을 디지털로 변환해 다룬 풍경이었다면, ‘재촬영 풍경’은 디지털을 아날로그로 변환한 것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순서가 바뀐 것이다.
이미지 자체를 찍는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처음에는 한 건물을 촬영한 것을 조작했는데, 인화된 건물 사진을 재촬영하니 그것은 원래 건물을 찍은 사진이 아닌게 되었다. 원래 건물에서 멀어지고, 점점 가상이 된다. 복사기와 팩시밀리가 생겼을 때 이를 이용한 작업들을 보면 반복적인 복사를 통해 화질이 점점 나빠지면서 존재가 나중에 검게 지워져 버린다.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지만 복사의 과정을 통해 더이상 그것이 아닌 흔적만 남아버린다. 더이상 실제라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거짓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애매한 경계에 있다. 건물을 찍는 것에서 벗어난 현실과 가상, 아날로그와 디지털, 실제와 이미지의 관계가 흥미로워서 시도한 작업이다.

디지털로 조작한 사진이라면 모든 것이 가상이지 않나? 작품에서 현실과 가상은 어떻게 드러나는가?
건물 앞의 지나가는 차들은 다른 시간에 지나간 차들을 촬영해 재구성한 것이다. 다양한 시간과 공간들을 재구성해 가상의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었는데, 그 전체를 만들 때 모든 이용된 부분 부분들이 그 공간에 각각 다른 시간에 존재했던 사물을 촬영한 것이다. 사물의 맥락을 바꿔 재배치해 놓은 현대판 꼴라주이다. 보는 사람들은 어느 공간인지는 알 수 있지만, 한번에 찍은 것은 아닌 현실과 가상, 전체와 부분 등의 관계들을 생각하면서 현대에서 이미지를 실제로 어떻게 변하는지 생각할 수 있다.
장 보들리야르는 “이미지가 실제보다 더 실재 같다”고 말했다. 이론가들은 현대는 이미지의 포화상태, 이미지가 범람하는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미지가 현실을 지시하지만 내 사진 속 건물은 현실의 이미지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인식된 이미지이다. 실제를 찍어낸 구성물로서의 이미지가 아니고 이미지가 이미지로서 존재고, 이미지 스스로 유희하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현실과 가상의 문제는 90년대부터 이야기돼온 부분이고, 진부할 수 있는 주제이다.
좋아하는 영화가 매트릭스다. 우리가 믿었던 사회가 사실은 프로그램화된 사회고, 조작된  사회라는 점에 착안해 작업을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갈수록 거대한 시스템을 만들고, 이것이 도대체 어디까지 갈지에 관해 고민했다. 거창하지만 현실과 가상, 자본주의의 시스템과 그 속의 욕망에 의문을 던지고 이야기 나누고 싶었다.
그렇다. 현실과 가상의 문제는 9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시대적인 하나의 큰 흐름이다. 나는 그것을 내가 살고 있는 구체적인 공간 속 사물인 건물에 집중해 이야기하려 했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항상 지나치는 63빌딩을 봤을 때 평소에는 모르고 지나쳤던 것들을 다시 보게 되는 것이다. 아직까지 많은 사람들은 63빌딩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3번째로 높고, 63층도 아닌 60층이다. 85년에 세워진 이 빌딩은 한국의 상징으로 서울의 관광 상품으로 광고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욕망이 도시 속 건물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여주려고 했다. 매트릭스 같은 진부한 주제지만 좀더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제시해 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도시 풍경’ 시리즈에서는 현대인이 살아가는 건물도 있지만 경복궁이나 첨성대 등 고궁이나 유적을 촬영한 사진도 있다.
현재의 고궁은 사실 과거의 공간이 아니다. 과거의 공간을 느끼기 위해 찾는 극장과 같은 장소이다. 관광명소를 과장되게 표현해 현대사회에서 고궁이나 유적이 역사가 아니라 하나의 상업적인 공간임을 말하고 싶었다. 꼭 유리나 철 구조물로 만들어진 세련된 건물이나 유명한 건축가가 만든 세계적인 건물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궁이나 유적 등도 관광상품으로 쓰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글/진달래기자(월간사진 2006년 9월호)



임상빈 홈페이지 www.sangbini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