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Roland Grard Barthes, 1915∼1980)

1915년 프랑스 북부 쉐르부르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폐결핵으로 고등사범학교 진학과 교수자격시험을 포기한 후, 파리대에서 고전문학 학위를 받고 1940년 파리대학 교수로 취임했고, 1948년 이후 부카레스트와 알렉산드리아의 대학강사, 외무성 근무를 거쳐 1953년 프랑스 국립과학센터에서 어휘학과 기호론을 연구했다. 1960년 에콜 프라티크의 교수가 되고, 신비평(新批評)의 대표적 존재로서 사회학·정신분석·언어학의 성과를 활용한 대담한 이론을 전개하여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바르트는 1953년 《글쓰기의 영도》와 1957년 《현대의 신화》를 잇달아 발표하며 프랑스 지성계로부터 주목받았다. 특히 1970년에 출간된 《텍스트의 즐거움》은 문학비평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에서 그는 ‘저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을 선언했다. 바르트는 문학작품이란 완벽하게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선조들과 문화가 남겨놓은 것을 조립한 것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저자가 아닌 ‘필사자(scripteur)’라는 용어를 썼다. 바르트에 따르면 저자와 독자는 일방적인 생산자와 소비자가 아니라 텍스트 속에서 서로를 찾고 만나고 텍스트를 즐겨야 할 관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만화·사진·패션 등 현대 부르주아 사회를 둘러싼 신화를 읽어내고 그 베일을 벗겨내던 그는 1980년 미테랑 사회당 당수가 주최한 회식에 참석하고 걸어서 귀가하다 트럭에 치인 후유증으로 한 달 후 사망했다. 주요 저서로 《영도(零度)의 문학》(1953), 《비평과 진실》(1966), 《기호학 개론》(1965)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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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신화·기호·텍스트·소설 등 다양하고 유동적인 사유체계로 유명한 롤랑 바르트. 그는 글쓰기의 개념을 통하여 문학연구에 최초로 주체와 역사를 도입했고, 기호학을 통해 언어와 형태에 관한 끊임없는 관심을 과시했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욕망·즐거움·육체 등에도 사유의 지경을 넓혀갔다. 이 글에서 필자는 언어 속에서 작동되는 의미와 상징들의 수사학을 알고 있던 바르트가 언어학적·기호학적 함축에 의존하지 않는 사진을 통해 사물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가능성을 가졌음을 일깨워 준다. 가장 인위적인 이미지가 가장 자연적인 이미지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관심, 그리고 그로부터 촉발된 기호학적 관심에 깊이 빠진 작가가 있다면, 그는 그림에서 무엇을 볼까?

1. 바르트는 그림에 대해 많은 글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미 언어 예술에 대해 날카로운 눈을 가진 터였기에, 그림을 범상하게 볼 수 없었다. 언어 속에서 작동되는 의미와 상징들의 수사학을 알기에, 그는 무엇보다 이미지를 그 관계 속에서 관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술사적으로 이미지를 관찰하는 과정에 그는 우연찮게도 그림보다는 사진에 놀라는 듯하다.

사진에서 그가 처음에 경탄한 것은, 어떠한 언어학적 혹은 기호학적 함축 혹은 내포(connotation)에 의존하지 않는 순전한 외시(外示, denotation)의 가능성이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끝없이, 정말 끝없이 언어에 달라붙어 있는 의미 혹은 상징의 내포로부터 뚝 떨어진 새로운 가능성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사진은 어떤 예술 영역에서도 가능하지 않았던 가능성, 곧 사물 이미지를 그대로 뻔하게 아닌 뻔뻔하게 드러내는 가능성을 가지지 않는가? 이 인식에 바르트는 거의 열광했다. 예술사적 혹은 인류학적 기적이자 역설이라고 생각했다. “코드의 부재는 메시지를 탈지성(知性)화한다.” 가장 기계적이고 인위적인 매체라고 볼 수 있는 사진이 사물의 이미지를 날 것 그대로 보여 준다니! 또 다른 매체와 비교할 때 최대한 작가의 관습적 개입에서 독립하여 사물의 이미지를 보여 준다니! 다른 예술은 오랜 학습과 관습을 통해 익히고 또 익혀야 하는데, 사진은 사물을 그 멍한 침묵과 애매함 속에서 그대로 보여 주지 않는가! 그리고 여기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는 것은 그것을 자연 상태에서 보여 준다는 말이 아닌가? 그렇다면 가장 인위적인 이미지가 가장 자연적인 이미지에 가까워진다는 말이 아닌가?

이렇게 바르트가 사진의 외시 가능성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외시가 재현적 유사성에 자연적으로 충실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기호들이 자의적 관습과 문화적 훈련 덕택에 작동한다면, 사진 이미지는 그것을 초월해 직접적인 유사성에 근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직접적인 유사성을 믿기 위해서는 이미 사물의 존재론적 실체를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이 전제는 그것이 가지는 근본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성격 때문에 유지되기 힘들다. 그러므로 가만히 보면 재현적 유사성에 근거해 이미지의 외시를 얻으려는 시도는 생각했던 것처럼 쉽지도 않고 만만하지도 않다.

다른 한편으로 미학적이며 상징적 코드에서 벗어나는 사진의 가능성에 대해 바르트가 그저 순진하게 열광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사진의 가능성이 다름아닌 그것의 사회적 기능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사진을 ‘예술’로 승화시키려는 프로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일반인들도 사회적 유대를 확보하고 확인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있으니. “다른 모든 구조화된 의미작용처럼 사진의 내포도 제도적인 행위이며, 전체 사회의 차원에서 그것의 기능은 인간을 통합하고 안심시키는 것이다.”

이미 이런 서술에서 사진의 기호학적 명암이 교차한다. 한편으로는 사진에 고유한 코드 없음을 부각하면서도, 기호학자 바르트는 다른 한편으로 “저널 사진처럼 광범위한 통신의 내포의 코드를 재구성”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바르트는 자신도 모르는 새 사진의 외시 가능성을 찾는 일과, 거꾸로 상징적 코드를 인정하고 서술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한다. 곧 외시 이미지에서 자연을 찾는 일과 상징적 코드의 정치적 힘을 인정하는 일 사이에서 방황한다.

그 후 바르트는 사진에 관해 이런 기호학적 지평을 버리는 데까지 나아간다. 죽은 해에 출간된 책(《La chambre claire. Note sur la photopraphie》, 1980)에서 그가 어떤 기호학적 열성이나 제도적 공부(라틴어 studium이 지시하는 것)로 잡히지 않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거의 이름붙일 수 없는 작은 디테일이 보는 사람을 찌를 때, ‘상처’ 혹은 ‘혼란’이 사진을 보는 사람에게 남을 뿐이다. 보도사진에서 볼 수 있는 사회적 충격도 아니고, 예술사진에서 볼 수 있는 미학적 충격도 아닌, 상처와 혼돈. 우리 몸과 마음을 아프게 찌르는 뾰족한 점. 그 이전에 그가 그렇게 집착했던 기호학적 개념 내포와 외시는 여기서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듯하다. 그 대신 그렇게 ‘사소한’ 디테일에 찔린 사람은 어떤 욕망이나 열정을 간직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지극히 사적인 욕망이나 열정. 그러면서 그는 죽은 어머니의 사진을 보고 또 보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을 환기시키고 그 죽음의 환기 속에서만 살아 있는 사진에 놀라고 또 놀라면서.

2. 이런 극도의 사적인 고백이 왜 나왔을까? 줄기차게 예술이 되려고 하는 사진 앞에서 그는 왜 사진이 조용하고도 완강하게 죽음을 환기시켜 주길 바랐을까? 죽음을 마주한 개인의 실존적 예감 때문이었을까?

서양예술사 속에서(물론 그중에서도 언어예술이 특히 그렇지만) 상징의 역할은 남다른 데가 있다. 문명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것도, 기호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무엇보다 내포와 상징을 둘러싼 갈등과 싸움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확한 서술은 아니다. 미학적 기호와 상징이 문명 속의 이데올로기를 인과적으로 혹은 직접적으로 생산한 것은 아닐 터이니까. 다만 정치적이고 사회적 이데올로기와 문화적이고 미학적인 상징들은 서로 뗄 수 없이 얽혀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이 상징의 수사학이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갈등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분석하면서, 동시에 그 상징으로부터 이탈을 꿈꾼다. 그러나 이 얼마나 역설적인 일인가? 기호학적 구조의 힘과 강박을 전제하는 기호학적 작업이 그로부터의 이탈을 꿈꾸다니? 상업광고가 모든 종류의 사회적·미학적인 상징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판에, 상징으로부터 이탈을 꿈꾸다니!

이 역설 속에서 바르트는 움직이고 또 움직인다. 의미의 상징적 텍스트를 분석하면서도 그는 탈상징의 길을 가고자 한다. 그리고 이 탈상징의 길은 탈구조의 길과 같은 방향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의미가 생산되는 복잡한 텍스트에 주의하면서 탈구조적 실존의 상처를 보듬기는 어려운 일이다. 더구나 바르트는 작가의 죽음을 선포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작품에서 텍스트로’의 이행을 주장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상징으로부터의 이탈과 실존적 상처의 발견조차 단순히 주체적 작가를 회복하자고 주장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미술에 대한 바르트의 관심을 우리는 이 지점에서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도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 사진의 외시 가능성에 주목하던 시기에 그는 당연하게도 사진의 영역을 그림의 영역과 날카롭게 구분하였다. 사진 이미지가 사물과의 유사성에 근거해 직접 드러난다면, 그림 속의 이미지는 문화적인 코드의 영향을 크게 받는 듯했기 때문이다. 1964년에 발표된 《이미지의 수사학》에서 그는 그림의 코드적 본성은 세 차원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첫째, 한 사물이나 풍경을 그림으로 재생산하는 일은 규칙화된 변환을 강요한다. 회화적 복사의 본성(자연, na-ture)은 존재하지 않으며, 변환의 코드는 역사적이다. 특히 원근법에 대해서 그렇다. 다음에, 그림의 작동(코드화시키기)은 곧바로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의 나눔을 강요한다. 그림은 모든 것을 재생산하지 않으며, 때로는 심지어 아주 조금만 재생산한다. 그러면서도 아주 강한 메시지이기를 중단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진은, 비록 그것이 주제와 틀과 각도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대상의 내부에 간섭하지는 않는다(속임수를 빼고는 말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림의 외시는 사진적 외시보다 순수하지 않다. 스타일 없는 그림은 없기 때문이다. 끝으로, 모든 코드와 마찬가지로, 그림은 훈련을 요구한다(소쉬르는 이 기호학적 사실에 커다란 중요성을 부과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기호학적 차원에서 사진의 외시를 기준으로 삼았을 때 나온 것이다. 이 차원에서 그림의 외시는 사진의 외시보다 당연히 덜 순수하게 보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사물과의 유사성이 외시의 기본 조건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이 사진보다 더 규칙화된 변환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그리고 원근법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그림 그리기가 매우 역사적인 코드에 의존하는 것이 사실이더라도, 이 변환을 꼭 유사성에 대립된 영역으로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사물을 재현한다는 존재론적 원칙을 버린다면, 변환과 유사성의 대립은 그렇게 철두철미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또 그림에서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이 변환의 차원에서 크게 구분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진에서 그런 구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틀(cadre)의 관점에서는 사진에서도 그런 구분이 작동한다.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흐릿한 부분이 사진의 틀 안에서 얼마든지 생산되고 조작된다는 것은 사진의 상식에 속하지 않은가? 물론 그림 그리는 일이 사진보다 훈련을 요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전혀 훈련을 요구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사진은 사물의 모습을 날것으로 보여 준다는 믿음 자체는 너무 자연적인 유사성에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문화적 상징구조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단적으로, 그리고 단번에 거기서 도망간다는 말은 아닐 터이니까. 우리는 오히려 문화 안에서, 문화적 상징 안에서, 아주 오랜 훈련을 통해 미학적으로 이탈하면서 겨우 도망가곤 하지 않는가? 설혹 사진이 어떤 미학적 도구보다 대상의 외시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고 하더라도, 사진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텍스트 자체가 일정하게 근대적인 맥락을 따르고 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는 것 아닌가?

따라서 우리는 위의 세 가지 그림의 코드적 성격을 다시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첫째, 그림이 어떤 변환의 규칙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규칙들이 이미 결정된 것은 아니다. 또는 부분적으로 결정되었더라도 부분적으로는 비결정적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결정된 몫이 얼마나 크고 작은가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더 중요한 점은 규칙이 결정된 듯이 보이더라도, 좋은 그림은 언제나 새롭게 외시적 차원을 열어 보인다는 것이다. 새롭게 그리기, 그것은 비록 일정한 규칙을 따르는 한가운데에서도 언제나 새로운 열림 앞에서 흔들린다. 그림 그리는 규칙이 그저 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그리고 그에 의해 결정되었다고 말하지 말고, 그런 회화적 규칙을 발견하는 일 자체도 대상의 외시를 살리는 길이라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둘째, 사진은 속임수를 제외하고는 대상의 내부에 개입하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맞는 말인 듯하다. 그러나 속임수는 실제로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는가? 개인적인 용도의 사진이든 보도사진이든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현실적이지 않은가? 실제로 바르트 자신도 속임수를 좀더 포괄적으로 파악한 적도 있지 않은가? “속임수의 방법론적 관심, 그것은 예고하지 않고 심지어 외시의 평면 안으로까지 개입한다.” 더구나 사진의 디지털 차원이 확장될수록 유사성의 원칙은 근본적으로 손상될 것이다. 가만히 보면 ‘속임수’ 자체는 유사성의 원칙과 대립되기는커녕 거기에 의존한다고 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학습의 원칙은? 그림 그리는 일이 학습을 필요로 하고 사진 찍는 일보다 더 학습을 필요로 한다는 말은 맞다. 그러나 누구나 사진 찍을 수 있다고 사진에 학습이 필요없는 것일까? 한편으로 누구나 사진을 찍지만 아마추어와 프로의 차이는 엄연한 게 아닐까? 그 차이는 단순히 직업의 차이만은 아니다. 사진의 규범화 혹은 전문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경향이 아닐까? 이 점은 사진의 외시적 특성을 강조하려는 바르트의 시도에서도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그는 예술사진이 아니라 일반 보도사진을 대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모방하는 예술에게 공통적인 내포 체계의 코드(“보편적인 상징체계를 통해 구성되든 시대적인 수사학을 통해 구성되든”)를 주장한 후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런데 원칙적으로 사진에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다. 어쨌든 결코 예술사진이 아닌 보도사진에는 그렇다.” 이 말은 거꾸로 전문가적이거나 예술적인 사진들은 그 나름대로 시대적인 수사학에 의존하거나 역사적인 코드에 의존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사진의 전문화 혹은 예술화는 아마도 보도사진조차 쉽게 거역하기 힘들 정도로 확장되고 강화된 게 아닐까?

사진의 기호학적 분석은 헛돈다. 바르트 자신은 “그 자체로 사회학적인 분석에 선행하는, 사진이라는 근원적인 구조의 내재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사회학적 분석에 선행하는 내재적 분석의 차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이라는 근원적인 구조의 내재적인 분석”은 가만히 보면 겨우 사진 이미지에 고유한 ‘완벽한 유사성’을 확인하고 설정하는 일에 얽매인 게 아닐까? 유사성의 절대적인 원칙을 설정하기보다는 차라리, 좀더 유연한 방식으로 기호마다 다른 외시의 가능성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그림에 대해서는 그것의 코드화에 필수적인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수사학을 강조하면서, 왜 사진에 대해서는 “사진이라는 근원적인 구조의 내재적인 분석”에 매달리는 것일까? 서로의 굵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진도 그림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매우 역사적인 구조, 곧 사진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현대사회의 코드와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점에서 그림 그리기에 필요한 ‘학습’의 성격에 대해서도 좀더 섬세한 분석이 필요하다. ‘학습’은 그저 이미 결정된 규칙의 틀에 무조건 따르는 일일까? 그 경우 미학적 구조는 너무 폐쇄적이며 선험적이지 않을까? 물론 과거에 그림의 스타일을 결정하는 규칙이 많건 적건 그런 학습의 성격을 가졌던 것은 사실일 것이다. 매우 다양한 스타일이 생긴 20세기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스타일이 존재했다고도 할 수 있다. 또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림 그리기란 기껏해야 이미 주어진 관습적 규칙에 일방적이고도 수동적으로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림 그리는 일이 다만 그런 규범적 혹은 관습적 학습에 예속된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좀더 포괄적이며 열린 차원의 ‘학습’에 직면한다. 이미 고정된 규칙들의 체계에 단순히 일방적이고도 수동적으로 따르는 방식이기보다는, 규칙을 따르고 발견하는 과정에도 끝없이 회의하며 그것을 부분적으로 바꿀 수 있는 움직임. 규칙을 따르면서도 사람들은 언제든지 그 규칙을 많건 적건 변화시키고 개조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학습’은 단순히 코드의 폐쇄적인 구조화에 그치지 않고, 새로운 규칙을 찾아나서면서 구조에서 이탈하는 탈구조화의 성격을 가진다.

3. 그러므로 외시 이미지는 아예 훈련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오랜 학습과 훈련을 통해서 예술은 겨우 이 외시에게 가는 길로 접어든다. 그러면서도 바로 그 학습과 훈련을 놓으면서, 예술은 외시되는 사물을 이미지 속에서 외시한다. 그런데 바르트는 나중에야 회화에서 비로소 이 가능성에 주목하는 듯하다. 예를 들자면 아르침볼도의 그림을 관찰하면서 쓴 《아르침볼도 혹은 수사학자이며 마술사》라는 글(1978)에서, 사진에서는 외시라는 기호학적 개념조차 벗어 버리는 데까지 나갔지만, 회화의 경우 그는 비교적 늦게 이 외시 가능성을 발견한 셈이다. 동시대 화가의 그림을 관찰하면서 얻은 발견이 아니라, 바로크 시대의 화가를 관찰하면서 얻은 발견이라 이미 때늦은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들 수 있지만, 실제로 그 인식은 새롭다.

우선 첫째로, 바르트는 아르침볼도의 그림이 매우 시적임을 발견한다. 여기서 시적이라는 것은 공연히 서정성을 꾸민다는 말이 아니라, 언어 예술가가 언어를 가공하듯이 아르침볼도도 이미지를 수사학적으로 가공했다는 말이다. 모든 과일과 채소, 더 나아가 모든 사물로 인물 초상화를 그리거나 사계절을 연상시키는 화가의 작업에서, 사물들은 쉽게 인물의 이미지를 은유하거나 환유한다. 은유와 환유는 아주 오래된 시적 작업의 특징이 아닌가? 당근이 코가 되고, 양파가 두 뺨이 되며 그릇이 모자가 되는 형국. 여기서는 아무것도 외시되지 않고, 모든 것이 은유와 환유 속에 던져진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음 순간 이 은유의 성격이 바뀐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은유의 작동방식이 대담하기 때문에 생긴다. 화가는 그저 한 사물의 이미지가 얼굴과 비슷하거나 닮게 보이게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아예 “닮게 만든다.”유사적인 끈이 확장되는 것이다. 당근은 코와 닮은 것이 아니라 아예 코이고, 커다란 양파는 뺨을 은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빵빵한 뺨이며, 그릇은 이미 모자이다. 물론 이런 은유는 있을 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보다 더 대담한 방식은 아예 은유하거나 상징하지도 않고, 그저 사물이나 이미지의 자리를 슬쩍 바꿔 버리는 것이다. 마치 마그리트가 <침입(Viol)>(1934)에서 가슴을 눈의 자리에 오게 하고, 배꼽을 입의 자리에 오게 하였듯이 말이다. 마찬가지로 아르침볼도 역시 한 가지를 드러내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마음대로 사용했다. 예를 들자면, 코를 말하고 싶어할 때, 그는 별의 별것을 다 스스럼없이 가져다 썼다. 배, 호박, 이삭, 꽃받침, 생선, 토끼의 엉덩이, 닭의 해골. 이런 스스럼없는 ‘닮게 만들기’는 은유나 상징을 극단화하는 지점에서 생겨난다. 다르게 말하면, 은유적이거나 상징적인 이미지의 사용은, 극단화되면서, 이미지의 외시적 측면을 드러내는 차원에 이른다. 배는 코이다. 그러나 배는 동시에 그저 배이다. 코로 사용될 수 있는 배나 호박은, 내포의 극단에서, 내포를 넘어간다. 여전히 배는 배이다. 배라는 사물은 그저 사물 배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또 변신한다. 하여튼 더 이상 단순한 은유나 상징은 아닌 것이다.

이런 과감한 작업은 팝아트에 이르면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극단화된다. “팝 아트가 원한 것은 사물을 탈상징화하는 것이며, 그것에 한 사실의 물질성과 둔한 고집을 주는 것이다. 존 케이지도 말했듯이, 상징이 아니라, 사물이 만들어진다.” 이미지가 되는 힘으로, 사물은 상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물건의 뻔한, 뻔뻔한 모습. 인조물의 퀭한 모습, 그것이 사물의 날모습이라니!

4. 상징의 홍수 속에서 탈상징을 발견하기라…. 그러나 인조물의 뻔한 모습 앞에서 사람들은 낯설어하지 않을까? 누가 선뜻 그것을 사물의 날(生)모습이라 생각할 것인가? 이상한 일이 아닌가? 사물의 날 모습이 그저 자연스런 유사성 속에서 존재하지 않고, 상징의 와중에 상징을 사정없이 부수고 버리면서 생긴다는 게. 누가 그처럼 냉정하고 냉정하고 또 냉정할 것인가? 누가 그처럼 겁이 없고 뻔뻔할 것인가?
사물의 날모습, 사물이 자신의 상징의 탈에서 벗어난 모습은 이처럼 빙빙 돌면서 현기증이 나는 자리다. 그리고 바르트도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빠지면서 현기증을 느끼기도 했나 보다. 사진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그도 사물의 외시를 ‘자연적인’ 유사성에서 찾았던 적이 있지 않은가? 아마도 이 유사적 외시가 아주 자연적인 날모습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리라.

다른 한편으로, 이 점은 톰블리(Twombly)에 대한 그의 글에서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의 작업을 목적 없는 떠돎으로 파악한 바르트는 난데없이 동양의 지혜를 인용한다. 다름아닌 노자. 도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생산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행위한다. 일이 성취되어도, 그는 거기 집착하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기에, 공은 남는다고.

그러나 노자의 ‘무위자연’은 미끈한 유혹이 아닐까?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그런 말 자체가 이미 자신도 모르는 거대한 제스처가 아닐까? 몇 마디 안 되는 오천의 말로 세상의 이미지를 모두 잡으려는 텍스트는 세상 ‘들’의 복잡성과 세상‘들’ 사이의 외침을 무시하는 게 아닐까? 성스럽게 단순한 지혜의 탈을 쓴 매너리즘이 아닐까? 너무 쉽게 ‘자연’을 자연화하려는 게 아닐까?

이미지의 자연은 ‘저절로 그렇기’ 힘들다. 매우 힘들다. 이데올로기적 상징의 탈을 단번에 시원하게 벗어 버린 날모습은 우리의 염원과는 달리 쉽게 오지는 않을 듯하다. 상징을 너무 쉽게 초월하려는 의지는 자칫하면 자연의 형이상학, 비어 있음의 형이상학, 무위의 형이상학에 빠지기 십상이니, 어쩔 것인가. 훈련된 열성(studium)으로 가득 찬 사진 한가운데서 잘 보이지 않는 디테일이 우리 눈을 콕 혹은 쿡 찌르듯이, 그림은 은유와 환유의 극단에서만 겨우 상징에서 벗어날 것인가. 상징의 지옥 한가운데에서만 우리는 상징의 탈에서 벗어날 것인가. 상징의 아수라 한가운데에서만, 그럴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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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은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거쳐 하이델베르그 대학에서 철학과 문학, 그리고 미술사를 공부하였다. 현재 인하대학교 인문학부에 재직 중이며, 저서로는 《탈형이상학과 탈변증법》, 《초월에서 포월로 1》, 《니체에서 세르까지. 초월에서 포월로 2》, 《이상현실, 가상현실, 환상 현실. 초월에서 포월로 3》 등이 있다. 그 외 다수의 문학 평론 및 미술, 영화, 건축 평론을 썼다.
 
 월간미술(2002,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