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사진을 찍으려면 마틴 파를 잡아라”

옆에 있던 병사가 픽픽 쓰러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는 가 본 적이 없지만 최루탄이 머리 위로 지나가고 쇠파이프와 '짱돌'이 눈앞에서 핑핑 번쩍거리는 현장에서 사진을 찍은 적은 꽤 있다. 또한 대포 같은 600mm 렌즈를 들고 세계에서 몰려온 최고의 스포츠 사진가들과 (장소가 좁기 때문에) 그야말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호흡을 아껴가면서 공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월드컵경기장에도 가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파리의 고등학교 운동장 한 켠에서 내가 찍으려고 들었던 그 사진은 다른 현장과 비교해도 세상에서 가장 찍기 어려운 사진 중의 하나였다. (사진에 대해선) 도대체가 세상에서 가장 '까칠한' 사람들이 모였고 아주 어렵게 입장 허락을 받은 것이 파티 장소인데 저마다 샴페인이나 와인을 한 잔씩 들고 노니는 와중이었다.

브뤼노가 사람들을 설득하러 가기 전에 이런 조언을 줬다. "기념사진을 성사시키려면 마틴 파를 잡아라."

매그넘 회원들 안에서도 특히 잘나가는데다가 아마도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것으로 판단하고 그를 찾아가서 협조를 구했더니 흔쾌하게 응했다.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고 간간히 인터뷰를 이어가면서 한 명씩 세를 불려 나갔다.

최고 원로인 엘리엇 어윗이 ‘줄서기 기준’ 자임

결국 당초 구보타의 비관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브뤼노 등의 협력 덕분에 기념사진 촬영에 성공할 수 있었다. 구보타는 사람들을 모으러 다니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내일(27일) 총회 점심시간에 단체사진을 찍자고 이야기했었다. 그럼에도 브뤼노는 "세상엔 바로 해치울 일이 있고 그렇지 않은 일도 있다"고 적극적이었다. 미리 하는 이야기지만 다음날 점심 때 잠깐 총회장에서 구보타를 만났더니 "어제 안 찍었으면 못할 뻔했다"며 껄껄 웃었다.

구보타, 브뤼노 등이 매그넘 회원들을 데리러 간 사이에 기자는 단체 사진 촬영에 적합한 자리를 물색했다. 최소 5~6명은 모일 것으로 보고, 한쪽 벽을 배경으로 찍으려 화분을 치우고 있었는데 이를 지켜보던 매그넘 한 명이 "벽을 배경으로 하면 안되지. 파티장이 보이려면 반대로 하라"고 참견을 했다. 현장감을 살리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

혼잣말로 "누가 몰라서 그랬나? 파티에 지장주지 않게 조용히 한쪽에서 찍으려고 그랬지"하면서도 "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라고 맞장구치면서 앵글을 반대로 바꿨다. 최고 원로 중 한 명인 어윗이 마틴 파와 함께 오른쪽 구석으로 가서 기준을 잡자 일은 쉽게 풀려나갔다. 깐깐하고 단답형으로만 질문에 답하던 마욜리도 모습을 보였고 리즈 사르파티, 크리스 스틸 퍼킨스, 이언 베리까지 등장했다. 얼핏 10명이 넘어가자 마음이 급해진 구보타가 빨리빨리(quickly)를 연발하며 재촉했다. 자칫 시간을 끌다가 사람들이 다시 흩어질까 조바심이 났던 것이다.

“현수막이 한글이라고? 그럼 괜찮아, 아무도 모르잖아?”

일단 광각렌즈로 갈아 끼고 플래시를 달았다. 그리고 임무의 마지막 수순인 현수막을 꺼냈다. 이 현수막은 출장 떠나기 전날 저녁 급히 아이디어가 떠올라 매그넘 전시회팀에 주문해 갖고 온 것이다. 매그넘 작가들이 직접 매그넘코리아 전시회를 알리는 게 좋겠다는 취지에서였다. 사업팀의 조언에 따라 현수막에는 한글로 "매그넘코리아 사진전 축하합니다"라고 새겼다.

거듭해서 들리는 '빨리'를 들으면서 배낭에서 현수막을 꺼내 펼치기 시작했다. 당황한 구보타가 "그거 뭔데? 어 현수막은 안된다. 겨우 사람들 모았는데 그거 있으면 다 흩어질지도 모르니 그냥 찍자"고 손사래를 쳤다.

10명은 넘었고 절반은 성공한 셈이지만 그래도 아쉬웠다. 그래서 머뭇머뭇 현수막을 펼치지도 접지도 못하고 있던 차에 브뤼노가 그거 좀 보자면서 다가왔다.

"어 이게 어느 나라 말이지? 한글이라고? 그럼 괜찮지 뭐. 아무도 몰라. 여기 모인 사람들 중에 이거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당신 말고 아무도 없어"라면서 주변의 동의를 구했더니 누군가가 "어디 보세. 이거 중국말인가? 한국어라고…. 그럼 괜찮아, 꺼내 꺼내"라며 한 쪽을 잡고 펼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빨리 찍자는 분위기였다. 어윗이 오른쪽 끝을 잡고 아뤼 그뤼에르가 왼쪽을 잡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었다. 높이를 확보하기 위해 의자를 놓고 그 와중에도 예의를 차리기 위해 신발을 벗고 올랐다. 두 세 컷을 누른 뒤 밝은 표정을 주문하며 몇 컷 더 눌렀다. 마틴 파가 와인잔을 일라이 리드의 대머리 위로 올린 것은 사실 못 봤다. 다만 처음에 인터뷰도 거절했던 르네 뷔리가 뒤늦게 대열에 동참하는 것은 봤다. 역시 사진 좀 찍는 사람답게 자기 자리가 없자 의자를 놓고 올라서 이언 베리와 스틸 퍼킨스 사이에 불쑥 솟아올랐다. 몇 컷 더 눌렀다. 마욜리를 빼고 나면 모두 사진 경력에서 나보다 최고 30년 넘게 앞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브뤼노, 사람 불러 모으느라 정작 자신은 못 찍어

순식간에 단체 사진은 끝이 났다. 찍은 사진을 보며 머릿수를 세어봤더니 뜻밖에 브뤼노 바르베가 없었다. 그는 그 사이에 한 명이라도 더 모으려고 딴 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대신 회장이면서 단체 사진에 부정적이었던 프랭클린 스튜어트가 어느 샌가 합류한 것이 위안이었다. 모두 12명이었다. 20명중 2명은 아예 파리에 오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만족할 수준이었다. 차분하고 내성적이었던 치엔치 창, 영어가 능통하지 않아 파티장에서도 잘 어울리지 못하던 러시아 출생 핀카소프 등이 빠져 있었다.

또 하나 다행스러운 것은 횝커가 현수막을 살짝 가려준 것이었다. 사진집의 표지사진을 장식하게 되어 더 없이 기분이 좋았던 독일 할아버지 토마스 횝커는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도 표지 사진을 놓치지 않았는데 그게 '사진전'이란 글자를 자연스럽게 가리고 있어서 시선을 덜 산만하게 만들었다.

다음날 점심시간에 보충 인터뷰를 했고, 그 다음날엔 총회 참석중인 매그넘코리아 참여작가 18명 중 16명의 서명을 사진집 표지사진에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애초 목표했던 임무를  완수하고 나니 어느덧 귀국 비행기를 타는 날이 밝아왔다.

곽윤섭 한겨레 사진전문기자 kwak1027@hani.co.kr



한겨레 전문기자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현 <한겨레> 사진전문기자, 2005년부터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사진 클리닉'강좌 및
<한겨레> 사진 상담 코너 운영. <나의 첫번째 사진책-즐거운 출사를 위한>
<나의 두번째 사진책-프레임 구성의 달인되기> 등 저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