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NT HAMILTON

(http://www.sxseventy.com)

 

고등학교 시절 저는 사진부원이었습니다. 전교에서 유일하게, 아니 15년 역사 사진부에서 유일하게 카메라 없이 활동한 유일한 사진부원이었어요. 사진부의 좋은 점은 암실을 마음대로 쓸 수 있었다는 점인데, 바늘만한 빛 한 점을 용납하지 않는 그 작고 어두운 공간은 야자를 땡땡이치거나, 혼자 소주를 마시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었습니다. 학교의 지원이 거의 없어 여러모로 재정이 빈약했던 저희 사진부는 현상액, 인화액, 정착액도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장만했습니다. 필름은 벌크로 사다가 근처 사진관에서 빈 필름통을 얻어다 암실에서 이어 붙여 쓰곤 했지요. 선배네 사진관에서 쓰다 남은 구닥다리 인화기도 감지덕지 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구질구질했지요.

그럼에도 인화하던 그 순간만큼은 이 모든 구질구질함을 모두 잊게 해줄만큼 황홀했습니다.

인화액이 담긴 철제통에 인화지를 넣고 살랑살랑 흔들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형상을 바라보는 기분은 아찔할 정도로 활홀했습니다.

 

제가 직접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어본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참이 지난 후였습니다.

아는 사람의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빌려 처음 셔터를 눌렀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진동과 함께 백지처럼 하얀 폴라로이드가 나왔을 때 저는 몹시나 긴장했었죠. 어디서 본 건 있어서 폴라로이드를 손끝으로 가볍게 잡고 살랑살랑 흔들었는데, 흡사 예전 그 암실에서 빨간 등 아래 인화지를 살랑살랑 흔들어 대던 그 떄의 기분이 되살아나 무척이나 황홀했습니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피사체.

우습게도 그 순간, 왠지 이 자그마한 폴라로이드 카메라 안에서 조그만 난쟁이들이 열심히 현상액을 붓고, 노출을 시키고, 인화액에 흠쩍 적셨다가 급하게 카메라 밖으로 밀어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고 긴 셔터의 여운, 폴라로이드 필름의 기분좋은 살랑거림, 폴라로이드 카메라 속에 살고 있을지도 모르는 분주한 난쟁이가 폴라로이드에 대한 제 첫 기억입니다.

 

폴라로이드의 가장 큰 장점은 빠르게 결과물을 확인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이유입니다. 폴라로이드는 가장 큰 장점은 결과물이 주는 느낌입니다. 순백의 직사각형 프레임은  그 자체로 훌륭한 액자입니다. 정갈한 프레임에는 슥-슥- 메모를 남길 수도 있지요. 폴라로이드의 색감은 어떻습니까. 강한 콘트라스트에 살짝 번져 나오는 이미지는 너무나 매혹적입니다.

 

그래서 저는 폴라로이드를 좋아합니다.

 

저는 얼마 전 폴라로이드로 작업하는 작가 한 명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그랜트 해밀턴(Grant Hamilton)이라는 이름의 작가의 작품은 폴라로이드로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흰 직사각형, 폴라로이드의 포맷 안에서 그는 차분하고 오묘한 컬러들을 풀어 놓고 있습니다. 두 장, 혹은 여러 장의 폴라로이드를 나란히 배치한 작품들은 때로는 조화로움으로, 때로는 하나의 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특히나 그의 Color Composition 작품들은 흡사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의 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물론 마크 로스코나 바넷 뉴먼 같은 색면구상의 거장들의 작품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거대한 캔버스가 아닌 손바닥만한 폴라로이드 안에서 펼쳐지는 色의 세계도 그 나름대로의 맛이 있습니다. 

 

그랜트 해밀턴은 제게 두 가지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며 얻는 마음의 즐거움이 첫 번째이고,

좋아하는 폴라로이드를 더 좋아하게 만들어 준 것이 두 번째입니다.

그 스스로 "폴라로이드는 Magic이다"라고 했다는데, 제게는 그가 Magic인 셈입니다.



출처  http://blog.naver.com/coffeemill/20056086686